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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몽타주를 중심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품으로, 낯선 제목만큼이나 당시 영화계에서 파격을 이끌어낸 작품이다. 이 영화가 갖는 특이성은 영화 내적으로 다양한 기법들이 시도되었다는 것이고, 그로인해 관객들은 상당한 부담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감독이 제시하는 대로 관객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에 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로인해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주목할 만하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하루를 추적하여 현대인의 공허하고 황량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사슬처럼 엮여 있고, 감독의 집요한 시선은 그들 네 사람을 향하고 있지만 앵글을 통한 관객의 시선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있는 시간과 공간은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스쳐 지나치고 만다. 이 인물들의 삶은 모두 어둡고 절망적이며 공허하고 황량하다. 네 개의 에피소드를 네 명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엮은 방식으로, 시간의 교차와 반복을 끄집어내며, 이를 통해 영화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의 모순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효과를 거두는 영화 속의 다양한 기법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 일상성의 묘사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조명과 함께 쇼트가 끊어지지 않는 롱테이크 기법은 현대인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데에 있어서 현실감을 불어넣어 준다. 흔히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리얼리티의 극치>로 표현한다. 감독은 데뷔작에서부터 치밀하게 현실을 자세히 내려다보고 있으며 그 안의 모습들을 처절하리만치 들추어내고 있다. 순수한 사랑에 대한 미화나 비도덕에 대한 폄하는 찾기 어렵고 현실 그대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인물들의 삶은 모순투성이 이다. 삼류소설가 효섭은 유부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린 여자친구도 있다. 자신의 삶을 바꾸려는 욕망은 자신을 더욱 위선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있으며 재판정에서 진술하는 그의 모습은 처절하게 묵살 당한다. 결벽증이 있는 남자가 매춘부와 관계를 맺고 성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발버둥을 치는 모습 또한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모순의 극대화이다.
생각과 말, 행동과 감정이 모두 어긋나고, 자아가 분열되는 모습이 시간과 공간의 교차와 대립 속에서 끊임없이 증폭되고 있음을 네 사람의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효섭이 자신에 대한 분노를 타인에게 폭발시키고, 아내와 자식의 사진을 지갑 속에 넣으며 매춘부에게 사랑하고 싶다고 소리치는 등 일상성에서 시작된 감독의 시선은 이미 비일상성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음식점 종업원이 실수를 하는 것은 늘 상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남편과의 불화, 사장과 직원의 갈등은 모두 흔히 겪는 문제들이지만 홍상수 감독은 이 점을 놓치고 있지 않으며, 이러한 일상성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 고정 카메라와 긴 쇼트 처리로 객관성을 확보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정보의 여과 과정을 행하도록 한다. 이러한 기법의 효과는 현대 세계의 일상성에 접근하는 방법을 보여줌과 동시에 관객에게 방법론에 있어서의 회의를 보여주는 듯 하다.
<강원도의 힘>에서는 이러한 일상성의 묘사가 더욱 세련된 기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일상으로부터의 탈피를 보여주면서, 이미지로 일상성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강원도라는 공간의 설정은 일탈의 공간으로서 자리잡고 있으며, 일탈의 공간을 고정 카메라와 롱 쇼트의 사용을 통해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이 전체적인 몽타주의 구성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교차를 중심으로 한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 <강원도의 힘>은 공간에 좀더 비중을 두고 강원도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를 더욱 배가시키는 내용적 구성을 통해 일탈을 꿈꾸는 상상력을 관객들에게 부여하고 있다.
-- 관조의 시선과 리얼리티
홍상수 감독은 호흡이 긴 롱테이크를 주로 사용함으로써 감독이 등장 인물의 주관적인 내면 공간 속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여준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운동 이미지가 최대한으로 억제되어 나타난다. 감독은 주요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서사를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겠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효섭이 민재와 만난 카페에서, 카페 입구에 놓인 화분 앞에 쭈그리고 앉아 화분 안에 있는 벌레를 가지고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이 모습을 효섭의 등 뒤 위 쪽에서 비추고 있다. 효섭의 시선을 배제하려는 감독의 의도이고, 효섭의 손가락에 놀림을 당하는 벌레는, 전체 영화의 주제와 맥이 닿아있는 듯 하다. 즉 우물에 빠진 돼지, 현대 사회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등장인물의 시선이 아니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영원히 벗어나기 힘든 화분 속에서 맴돌고 있는 가련한 존재가 바로, 일상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등장인물들을 환기시키며, 감독은 이것을 거리를 두고 관조하고 있다.
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은 굉장히 냉소적으로 다가온다. 같은 자리를 맴돌면서 서로 알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이나 지나친 불안이 가져오는 권태로움, 피가 난자한 살인이 벌어지지만 진부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장면에 있어서의 클로즈 업을 사용하는 않는 것이나 무미건조한 쇼트의 처리로 두드러진다. 누군가 칼에 찔려 죽어버렸는데도 관객들조차 별 감응이 없고 진부하게만 다가오는 것은 감독의 계산된 몽타주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냉소적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보고도 그저 흘낏 지나쳐 버린다. 시점을 갖고 있지 않는 이러한 쇼트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으면서 관객들이 어떤 인물과도 동일시 할 수 없도록 하여 그저 바라보도록 만든다. 결국 홍상수 감독 특유의 지독한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효과를 거둔다고 할 수 있다.
--- 서사적 구조의 해체 경향과 몽타주의 의미
네 명의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네 개의 에피소드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밑바닥에서부터 일상사를 숨김없이 그려내는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전혀 미화되거나 과장되거나 포장되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은 관객에게 낯설음으로 다가오고 이러한 낯설음의 근원은 지루할 정도로 긴 호흡의 서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어찌보면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장면들의 삽입으로 일상은 지연과 반복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커다란 내러티브의 핵심으로 응집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정신없이 분산되는 형국이다. 홍상수 감독이 어떤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편집하여 꾸며낸 장면의 몽타주라고 본다면, 이러한 서사 구조의 해체 경향으로 인해 남는 것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인 것이다. 일상의 껍데기들이 뒤엉켜 있는 구조는 감독의 독특한 몽타주 구성에 의해 실현된다. 세 번의 암전에 의해 분절되어 있는 네 개의 에피소드는 시간의 반복 혹은 중복에 얽혀 있으며, 촌스럽기 까지 한 고전적인 촬영기법에서 원근감이나 부피감은 찾아볼 수 없다. 내러티브의 해체 경향은 단순히 내용 전개를 흐트러뜨리는 것 뿐만 아니라 화면의 구성이나 편집 방법에 의해서도 시도되고 있는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는 서사 구조 해체의 도입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홍상수 감독의 다음 작품인 <강원도의 힘>에서는 더욱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잘라낸 필름을 관객은 스스로 메꾸어야 하며 감독이 만들어낸 서사 구조의 해체를 관객은 재구성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보통의 영화들에서 몽타주는 편집을 통해서 사건의 연속적인 흐름을 유지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인 몽타주는 이러한 시간적․공간적 건너뛰기를 이용하여 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음’을 실행한다. 즉 쇼트 사이에 규모, 리듬, 의미 면에서 유사한 두 행위를 서로 접합하여 촬영 각도를 완전히 바꾸어도 시간의 부재와 공간적 이동이 드러나지 않도록, 또 이 둘을 가능하게 하는 이음새가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전통적 영화관으로 판단할 때는 ‘훌륭한 장면 연결’, 장면에 있어서의 연속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몽타주는 사실주의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몽타주 이론의 틀을 마련한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를 단순한 쇼트의 결합이 아니라 쇼트와 쇼트가 충돌하여 제3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이미지의 충돌을 통한 새로운 의미 창조를 말한다. 후배의 출판사에서 자신의 원고를 우울하게 반납 받은 효섭은 육개장을 국물까지 마셔 버린 후 전화를 걸어 민재를 카페로 불러낸다. 민재로부터 돈을 받아 낸 효섭은 보경을 여관으로 데려가 미친 듯이 그녀의 육체를 탐한다. 효섭에게 버림받은 민재는 분식집에서 만두를 시켜 꾸역꾸역 입에 쑤셔 넣는다. 잠시 후 그녀의 육체를 민수가 게걸스럽게 유린한다. 육개장을 먹는 쇼트와 보경과의 정사 쇼트, 만두를 먹는 쇼트와 민수와의 정사 쇼트는 식욕과 성욕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으로 인해 현대인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몽타주의 구성은 서사 구조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 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정사 장면은 현대인의 욕구 불만을 상징하며, 다른 쇼트와 결합하여 대리충족을 하려는 몸부림으로 나타난다.
<강원도의 힘>에서는 연못에 거북이가 떠다니는 장면이라든지 횟집 수족관 유리벽에 달라붙어있는 칠성장어의 장면이 상당한 시간동안 영화에서 보여진다. 점프컷으로 나타나는 잉여의 쇼트뿐만이 아니라 내러티브의 전개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러한 쇼트들의 삽입은 서사 구조를 해체하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지만, 관객은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전후의 쇼트와 결합하여 창조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내리쬐는 태양이 반사되는 연못과 거기서 노는 한 쌍의 거북이는 지숙이 부르는 <꽃밭에서>의 노래와 겹치면서 일상성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나타낸다. 또 지숙과 미선이 싸우고 있는 장면에서 칠성장어 장면의 삽입은 갇힌 수족관 안에서 별 의미없이 붙어있는 칠성장어의 무의미함과 결합한다.
--- 잉여의 쇼트와 관객의 참여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정보 전달에 굉장히 인색하다. 이는 <강원도의 힘>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고정되어 있는 카메라와 과감한 쇼트의 생략으로 인한 점프컷 등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관객은 부분적으로 전달된 정보를 토대로 그 여백을 메워 나갈 수밖에 없다. 이 여백을 채우는 것은 배우들의 대사와 육체적인 움직임, 침묵을 지키면서 프레임에 나타나는 배경뿐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카메라는 어떤 한 공간을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배우들의 대사는 관객들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며 어두침침한 우물을 연상시킨다. 즉 프레임 자체가 현대인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우물을 일관되게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관객에게 충분히 제시되지 못한다면 관객은 무질서한 영화의 구도 속에서 자신의 정보를 적극 활용하려 할 것이고, 스스로에게 이해 가능한 체계를 구축한다. 모던 시네마의 특성 중의 하나가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고 한다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모던 시네마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있는 영화이다. 관객은 영화에 대한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텍스트에 대한 정보 잉여도를 메우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별적이고 적극적인 암호 해독 작업은 작가와 관객이 양방향으로 소통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다.
효섭이 협박, 상해, 손괴의 죄를 짓고 즉결 심판을 받으며, 판사에게 내뱉는 법정 진술은 어색하고 심지어 가증스럽다. 이 장면의 외화면(off-screen)에는 권위적인 말들만 내뱉는 판사가 있으며 그럴듯해 보이는 효섭의 최후진술은 판사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혼자만의 담론에 그친다. 소통의 부재는 결국 권태로운 일상에 대한 욕망의 분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배우의 연기와 설정된 이 장면을 통해, 효섭이 밤새 판사 앞에서 진술할 거창한 변론을 준비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빼놓은 잉여의 쇼트를 찾아내어 공백을 메우고 어떠한 해석을 부여할 권한도 관객에게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보경은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다가, 거실에 신문지를 한 장씩 깔고 그 위를 걸어 베란다의 문을 연다. 신문은 여러 가지 관련없는 잡다한 기사들을 모아놓은 것이고, 비슷한 내용들이 매일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일상과 유사하다. 그러한 신문지를 펼치고 그 위를 걷는 보경은 일상의 길을 걷는 것이고 그 위를 벗어나는 방법은 베란다의 문을 통해 나가는 것이다. 보경은 자살을 망설이는 듯하기도 하고, 그냥 단순히 답답한 마음의 숨통을 틔워보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채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 이후의 장면은 제시하지 않은 채 관객은 또 다시 여백을 건네받는다. 그 여백을 메우는 것은 관객의 상상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감독이 제시해 놓은 배경과 대사의 알레고리들을 수합하여 독창적으로 하나의 텍스트를 완성해 내는 것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을 빌리면, 거친 몽타주의 결합 역시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거친 몽타주 즉 화면이나 장면을 우연이나 반인과적 원리에 의해 연결시켰을 경우, 관객은 그것이 만들어진, 현실을 비틀고 왜곡시킨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실 현실은 인과적이기 보다는 반인과적이다. 그러나 관객은 인과적 원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장면이나 사건은 사실적인 것으로, 반인과적 원리나 우연의 원리에 의해 ‘거칠게’ 연결되는 장면이나 사건은 반 사실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친 몽타주를 극단적으로 사용한다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도 무너뜨릴 수 있다. 보경이 꿈을 꾸는 장면은 프레임이나 쇼트 상으로는 꿈과 현실이 구별되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현실과 환상이 거친 결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은 이 부분에서 혼란을 느끼게 되지만 시간과 공간의 다양한 층위를 결합함으로 인해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친 몽타주의 충돌 혹은 결합은 현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홍상수 감독은 이를 이용하여 잉여의 쇼트와 함께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현실과 결합된 보경의 꿈 속은 그마저도 지겨운 일상사로 채워져 있다. 보경은 일상을 벗어나 꿈조차 제대로 꿀 수 없으며 현실은 반복되는 상황을 극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은 그의 데뷔작품에서부터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하고 있다. 물론 모던 시네마의 일반적인 기법들을 많이 차용한 점에서 독창성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지만 현대인의 일상과 그 굴레를 나름의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해 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어찌보면 진부한 현대성에 관한 담론을 <우물>에 빠진 것으로 비유하여 우물을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쓰는 인간들에 대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찰은 심히 객관적이고, 관조적이며, 냉소적이기 까지 하다. 등장인물은 있지만 주인공은 없는, 현대인이 몰(沒)화 되어 나타나는 이 영화의 분석을 통해, 감독이 특정한 의도로 편집하고 꾸며진 장면의 몽타주를 가지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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